건천공 신도비 (巾川公 神道碑) 中州 聖賢(중주 성현)의 많은 後裔(후예)들이 살기 좋은 땅을 버리고 偏邦(편방)으로 옮겨 살고 계시는 분들은 孔孟程朱氏(공맹정주씨)이니 河南程氏 伊川先生(하남정씨 이천선생)의 후예도 또한 그 한분이시다. 그 當時(당시) 箕字(기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八條之敎(팔조지교)로 百姓(백성)을 가르치니 禮樂(예악)과 文物(문물)이 舊時代(구시대)와는 달리 많이 향상되었으나 그때 中華(중화)에서는 五胡(5호)가 亂立(난립)하여 世上(세상)이 어지러울 때 明道 伊川(명도 이천) 두 夫子(부자)도 살고자 함에 그 亂(난)을 피하여 偏邦(편방)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때 동방의 文敎(문교)가 점점 興(흥)하여 융성하여지니 小中華(소중화)라는 稱(칭)이 있었음은 儒敎(유교)가 크게 發展(발전)할 수 있는 징조이며 程氏(정씨)는 西紀976年 宋太子少師 羽(송태자소사 우)로 中始祖(중시조)를 삼으니 尙書員外郞 希振(상서원외랑 희진)과 開府儀三司(개부의삼사) 휼과 太中大夫 珦(태중대부 향)은 少師後(소사후)의 三世(3세)이다. 太中公(태중공)이 明道 伊川 兩夫子(명도 이천 양부자)를 生(생)하였고 伊川(이천)의 子 端中(자 단중)은 觀農營田事(관농영전사)요 翰林學士(한림학사)는 庇(비)요 樞密院事(추밀원사)는 應發(응발)이며 衛尉校丞(위위교승)은 思祖(사조)니 翰林 孔紹等(한림 공소등)과 함께 魯國公主(노국공주)를 모시고 고려에 처음으로 나와 그 벼슬이 殿中侍御史(전중시어사)가 되니 巾川先生(건천선생)의 考(고)이며 妣(비)는 貢氏(공씨)이니 父(부)는 錢塘太守(전당태수)의 載(재)이다. 公의 諱(휘)는 廣(광)이요 字(자)는 德魯(덕노)이며 벼슬은 殿中省判事(전중성판사)이니 돌아가신 年月(년월)은 오래되어 알길 없으나 公의 天性(천성)이 純孝(순효)하고 氣節(기절)이 뛰어나 父母(부모)를 奉養(봉양)함에 志體(지체)를 兼(겸)하였으며 喪事(상사)에 있어서는 哀(애)를 極盡(극진)하게 하였다. 당시 고려에서는 短喪(단상)을 행하였으나 公께서는 꼭 三年(3년)을 行(행)하시고 家廟(가묘)를 세워 至誠(지성)과 恭敬心(공경심)을 다하니 當時(당시)의 風俗(풍속)이 佛敎(불교)를 崇尙(숭상)함에 이를 개탄하며 이르시기를 우리 家門(가문)은 伊川先祖(이천선조)로부터 부처를 믿지 아니하였으며 排斥(배척)하기를 甚(심)히 嚴(엄)하게 하였다. 恭愍王四年(공민왕4년) 1355年 乙未(을미)에 그 벼슬이 殿中省判事(전중성판사)가 되어 鄭圃隱(정포은) 吉冶隱(길야은)과는 뜻이 같고 道가 같아 서로 國事(국사)를 論議(논의)할 때에는 어지러운 고려를 생각하며 눈물까지 흘렸다. 일찍이 滿月坮(만월대)에 올라 聯句(연구)를 읊으시는데 閔農隱安富(민농은안부)와 直提學安省(직제학안성)과 鄭圃隱(정포은)과 掌令徐甄(장의서견)과 籠岩金樹(농암김수)와 樞密李種學(추밀이종학)과 沙川伯南乙珍(사천백남을진)은 當時(당시)의 손꼽는 淸風流(청풍류)로서 그 절친한 親交(친교)의 뜻을 可(가)히 알수 있었으며 고려가 亡(망)하자 다함께 은거 罔僕(망복)하니 벼슬을 버리고 光州金塘山(광주금당산)에 돌아와 지금까지 行蹟(행적)을 散錄(산록)하니 그 序文(서문)에 쓰기를 忠節(충절)은 臣下(신하)의 大寶(대보)이며 옛 君子(군자)도 모든 國政(국정)이 문란해지면 바로잡도록 주선을 하였으니 진실한 忠節(충절)은 한번 잃으면 臣下(신하)의 道理(도리)가 아니라 하였으며 이제 亡國大夫(망국대부)로서 高麗國(고려국)의 회포를 이기지 못하나 後世(후세)사람으로서 臣下(신하)가 되어 두마음을 품은 者(자)는 부끄럽게 여겨왔다. 公의 뜻을 詩(시)로써 나타내기를 我以人間無似人(아이인간무사인)으로 肯作泉下有罪臣(긍작천하유죄신)인가 如將今日新國出(여장금일신국출)이면 後世其奈辱及身(後世其奈辱及身)고(내라는 인간이 무사한 사람으로서 지하에 가서도 죄 있는 신하가 될 것인가 만일 이제 새 나라에 나가 벼슬을 한다면 후세에 그 욕이 내 몸에 미쳐오는 것을 어찌하리오)하였다. 또한 아들에게 벼슬을 하지 말라는 경계詩(시)에서 汝亦麗朝臣(여역여조신)으로 何可事新君(하가사신군)고 若知人臣道(약지인신도)면 不忘前王恩(불망전왕은)이라(너도 또한 고려의 신하로서 어찌 새 임금을 섬길 것인가 만일 신하로서 그 도리를 안다면 전왕의 은혜를 잊지 못하리라)하였다. 黃翼成公(황익성공)이 벼슬을 버리고 山(산)으로 들어갈 때 古詩(고시)를 써서 증하기를 君登靑雲去 余忘靑山歸 雲山從此別 漏濕碧蘿衣(군등청운거 여망청산귀 운산종차별 누습벽라의; 그대는 청운을 타고 가는데 나는 청산을 바라보며 돌아 가도다 구름과 산이 이를 좇아 이별하니 눈물이 옷깃을 적시도다)이라 하였고 李太祖(이태조)께서 벼슬길에 나오라고 여러번 부르니 글로써 나타내기를 위로는 고려 왕씨를 저버릴 수 없고 아래로는 鄭夢周(정몽주)를 저버릴 수 없으니 죽지 못함이 부끄러울 뿐이라 거절하였고 그후 영영 隱居(은거)하여 조용한 一生(일생)을 마치니 墓(묘)는 光州金塘山 程郞洞 子坐(광주금당산 정랑동 자좌)에 있으며 夫人(부인)은 光山李氏(광산이씨)이니 掌令 彦章(장령 언장)의 딸이며 墓(묘)는 雙封(쌍봉)하였다. 三子(3자) 중 有連(유련)은 判尹(판윤)이요 有達(유달)은 進士(진사)요 有通(유통)은 府使(부사)이다. 判尹(판윤)의 子(자) 儒(유)는 進士(진사)요 任(임)도 進士(진사)이며 仁(인)은 府使(부사)이다.
가만히 돌아보건데 鄭侍郞 鴻慶(정시랑 홍경)이 遺業(유업)을 敍述(서술)한 글에서 말하기를 孟氏(맹씨)는 李朝國初(이조국초)로부터 이미 관직에 나가 벼슬을 하였고 孔氏(공씨)는 비로소 中宗(중종)때에 와서 학식과 문벌이 높아 규장각 홍문관 선원관의 벼슬에 올랐으며 朱氏(주씨)는 비로소 正祖(정조)때에 이르러 雲漠(운막)이 나타나 빛을 보게 되어 譜牒(보첩)이 增光(증광)되었는데 어찌하여 伊川(이천)의 後孫(후손)은 고려가 亡(망)하자 草野(초야)에 묻혀 벼슬을 아니 하셨는지! 後孫(후손)들은 이를 깊이 개탄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그 當時(당시) 程氏(정씨)는 先祖(선조)의 말씀대로 벼슬을 하지 말라는 訓戒(훈계)를 굳게 지켜 李朝五百年(이조500년)에 그 훌륭한 功績(공적)이 나타나지 않고 감추어져 흔적이 없어졌으니 이는 오직 程氏(정씨) 뿐이며 고려에 대한 忠節(충절)을 버리고 李朝(이조)에 나가 벼슬을 했었다면 程氏家門(정씨가문)은 大盛(대성)하였을 것이다. 선생의 高風偉節(고풍위절)이 兼志(겸지)하여 大賢(대현)의 後裔(후예)가 틀림없으며 이 뒷날 그 훌륭한 功績(공적)과 行蹟(행적)이 크게 나타나 반드시 밝게 빛나는 그날이 꼭 있을 것이다. 오래 전부터 先祖(선조)들의 文集(문집)을 刊行(간행)하여 이를 世上(세상)에 널리 알렸으면 程氏 家門(정씨 가문)이 더욱 밝게 大昌(대창) 하였으련만 은거생활로 草野(초야)에 묻혀 그 빛을 잃게 되었으니 오직 마음에 개탄할 일이나 巾川先生(건천선생)께서 남긴 遺文(유문)이라도 오래도록 소중히 간직하게 되었으니 이를 世上(세상)에 널리 刊行(간행)하여 親臣(친신) 또는 世祿臣(세록신)들이 그 文集(문집)을 읽고 程氏 家門(정씨 가문)을 알게 되었더라면 과연 忠節(충절)은 臣下(신하)의 大寶(대보)로서 진실로 그 忠節(충절)을 한 번 잃으면 臣下(신하)의 道理(도리)가 아니라고 느끼게 되었을 것이며 肯作有罪臣 其奈辱及身(긍작유죄신 기나욕급신)과 그 汝亦麗朝臣 何可事新君(여역여조신 하가사신군)과 그 上不負王氏 下負鄭某氏(상불부왕씨 하부정모씨)라 말씀하신 것을 보면 忠節(충절)의 根本(근본)이 무엇인가를 후예들에게 꼭 전하고자 함이다.
이제 公의 모든 事實(사실)을 神道碑(신도비)에 낱낱히 새겨 後人(후인)으로 하여금 이를 보고 느끼도록 함이니 이미 碑石(비석)이 갖추어져 程生 炳鉉(정생 병현)이 그 門長 老(문장 노)의 命(명)을 받아 碑(비)에 새기도록 大賢(대현)이 後裔(후예)가 이를 부탁하니 敢(감)히 늙었으나 이를 사양하지 못하노라. 伊川先生(이천선생)은 傳(전)치 못한 性理學(성리학)을 後世(후세)에 傳(전)하여 어두웠던 當時(당시)의 後人(후인)들을 밝은 世上(세상)으로 引導(인도)하여 깨우쳐 주었으니 구 뒷날 그 光華(광화)가 우리 나라에 까지 미쳐왔으며 先祖(선조)들의 뜻을 받들어 큰 德(덕)을 쌓아 三年喪(삼년상)을 홀로 行(행)하고 家訓(가훈)으로 佛敎(불교)를 排斥(배척)하니 鄭圃隱(정포은)과 吉冶隱(길야은)은 同志(동지)로서 禁止(금지)된 대궐에 出入(출입)하고 國亂(국란)과 國政(국정)의 어지러움에 傷心(상심)하니 감추려했던 눈물이 문뜩 가슴에 적시도다. 처음부터 은거생활로 돌아와 松都開京(송도개경)을 바라보며 詩(시)로써 모든 뜻을 나타내어 아들에게 벼슬을 하지 말라는 경계를 하였으나 죽지 못함이 부끄러울 뿐이며 두문불출 은거로서 자취를 감추어 버리니 위로는 忠節(충절)을 저버릴 수 없고 아래로는 親交(친교)의 道義(도의)를 저버릴 수 없었으나 오직 萬世(만세)의 倫常(윤상)이 깊이 뿌리내려 永遠(영원)히 빛나리라. 金塘山 程郞洞(금당산 정랑동)에서 公이 평생을 조용히 마치시니 高山(고산)같이 우러러보며 내 스스로 고개가 숙여지도다. 幸州 奇 宇 萬 撰 (1998무인보82면)하남정씨 마륵문중 카페 http://cafe.naver.com/hanamjj.caf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