解 題
崔錫起*)
1. 개요
≪二程全書≫는 北宋 때 학자 程顥(1032~1085)와 程頤(1033~1107) 형제가 저술한 ≪文集≫, ≪經說≫, ≪易傳≫ 및 후인들이 수집하여 편찬한 ≪遺書≫, ≪外書≫, ≪粹言≫ 등을 모두 수합하여 간행한 책이다. 宋元時代에는 이러한 책들이 개별적으로 간행되었고, 合刊을 하더라도 전체를 다 묶어 간행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河南程氏遺書≫, ≪河南程氏外書≫, ≪河南程氏文集≫, ≪河南程氏經說≫로 단독 간행되었고, ≪周易程氏傳≫과 ≪河南程氏粹言≫도 별책으로 간행되어 유통되었다. 그러다 명나라 때 이르러 비로소 이를 모두 합간하여 ≪二程全書≫ 또는 ≪二程集≫이라 일컫게 되었다.
二程(程顥와 程頤)은 北宋 때 新儒學을 일으키는 데 크게 공헌한 인물로 理學을 위주로 하는 洛學을 창립하였다. 이 二程의 洛學이 신유학을 집대성한 南宋의 朱熹로 이어져 이른바 程朱學이라 부르는 학문이 성립되었다. 따라서 이 ≪二程全書≫는 朱子學의 연원에 해당하는 二程의 학문과 사상이 모두 결집되어 있어 ≪朱子全書≫에 버금갈 정도로 소중한 책이다.
우리나라 조선시대는 宋代의 性理學, 그중에서도 程朱學을 위주로 하였다. 처음에는 朱子書를 위주로 학습하였지만, 주자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그 연원인 程子學에 대해서도 심도 있는 연구가 이루어져 조선후기에는 ≪二程全書≫의 글을 유형별로 분류한 ≪程書分類≫와 같은 의미 있는 책이 편찬되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보면, ≪二程全書≫는 조선시대 학계에 미친 영향이 ≪朱子全書≫ 다음으로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二程의 학문과 사상에 대한 연구가 미미할 뿐만 아니라, ≪二程全書≫에 대한 번역도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정주학에 대한 관심이 조선시대보다 현저히 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학문과 사상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朱子書는 물론 二程書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二程全書≫가 모두 번역되면 二程의 학술과 사상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요컨대 동아시아 학술동향과 전개양상을 충분히 이해한 바탕 위에서 조선시대 학자들의 학문과 사상이 조명되면 조선시대 학자들의 사상을 보다 객관적으로 심도 있게 조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이 바로 ≪二程全書≫가 모두 번역되어야 하는 당위성이자 필요성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二程全書≫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二程의 생애를 재구성하고, 이 책에 수록된 다양한 서적의 편찬 및 간행의 경위, 해당 문헌의 구성 및 내용, 후대에 미친 영향 및 의의 등을 고찰하고자 한다.
2. 二程의 생애와 학문
1) 程顥의 생애와 학문
程顥는 1032년(宋 仁宗 明道 元年) 부친의 임소인 湖北省 黃陂縣에서 부친 程珦과 모친 侯氏의 셋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字는 伯淳, 號는 明道이며, 諡號는 純公이다. 선조가 周나라 때 大司馬를 지내 程나라에 봉해져서 ‘程’을 姓으로 하였다. 정호는 본래 셋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첫째 형과 둘째 형이 어려서 죽어 字에 ‘伯’자를 쓴 것이다.
정호의 가계를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5대조 이전까지는 中山 博野(현 河北省 定縣)에 거주하였는데, 고조부 程羽가 宋 太宗 때 공을 세워 수도인 開封으로 이주하였다. 증조부 程希振은 尙書虞部 員外郞을 지냈는데, 伊川(현 伊川縣 城關)에 장사지냈다. 이후 조부대부터 河南(현 洛陽)으로 옮겨 살았다. 조부 程遹은 開府儀同三司 吏部尙書에 추증되었으며, 부친 程珦은 중앙과 지방의 관리를 수십 년 지낸 뒤 太中大夫로 致仕하고서 낙양 履道坊에 살았다. 이를 보면 정호의 집안은 북송 때 대대로 벼슬을 한 사대부 가문으로서 조부대에 낙양에 정착한 것을 알 수 있다.
정호는 어릴 적부터 타고난 자질이 남달랐다. 어려서 ≪詩經≫과 ≪書經≫을 암송할 정도로 기억력이 뛰어났으며, 10세 때 능히 詩賦를 지었다. 12∼13세 때 학교에 입학해 학업을 익혔는데 노성한 사람처럼 공부하였다. 戶部侍郞 彭思永이 학교에 가서 정호를 한 번 보고서 기특하게 여겨 딸을 시집보내기로 하였다. 정호는 일찍이 <酌貪泉>이란 시를 지었는데, “中心을 만약 스스로 견고하게 하면, 外物이 어찌 마음을 옮길 수 있으리.”라고 하여 심성을 수양해 도덕적 인격을 추구하고자 하는 지향을 드러냈다. 그리고 성장해서는 용감하게 분발하여 세속에 휩쓸리지 않고 그 길을 걸었다.
정호는 15∼16세 때 부친의 명으로 周敦頤에게 나아가 수학하였다. 관례를 치른 뒤에는 수도에 가서 수학하였는데, 명망이 자자하여 노숙한 학자들도 따라갈 수 없었다. 26세 때인 1057년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다음 해 京兆府 鄠縣(현 陝西省) 主簿에 임명되었다. 정호는 벼슬살이를 하면서 미신을 타파하는 데 힘을 쏟았으며, 지혜를 발휘하여 판결을 공정하게 하였다. 이후 上元縣(현 江蘇省) 主簿로 옮겼고, 임기를 마친 뒤에는 澤州 晉城縣(현 山西省) 縣令에 제수되었다. 그는 지방관으로 재직할 적에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항상 孝悌忠信을 가르쳤고, 고을의 수재를 뽑아 가르쳐 10여 년 만에 수백 명의 학자를 양성하였다.
정호는 1069년 呂公著의 천거로 太子中允과 監察御史裏行에 제수되었다. 神宗에게 몇 차례 정사를 아뢰었는데, 임금에게 진언한 것은 대체로 마음을 바르게 하고 人欲을 막으며 어진 이를 구하고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래 인용문은 당시에 올린 箚子로, 정호의 정신적 지향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신은 엎드려 아룁니다. 君道의 대체는 옛것을 상고하고 학문을 바르게 하여 善惡의 귀결을 밝히고, 忠邪의 구분을 변별해서 도를 추향하는 바른 자세를 분명히 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임금의 의지가 먼저 정해지는 데 달려 있으니, 임금의 의지가 정해지면 천하가 잘 다스려질 것입니다. 이른바 임금의 의지를 정한다는 것은 마음을 전일하게 하고 생각을 진실하게 하여 善을 택하여 굳게 잡는 것입니다. 의리를 먼저 극진히 하지 않으면 남의 말을 많이 듣고서는 쉽게 미혹되며, 의지를 먼저 정하지 않으면 善을 지키다가도 혹 마음이 변하게 됩니다. 오직 성인의 가르침을 반드시 따라야 하고, 선왕의 정치를 반드시 본받을 수 있다는 데에 마음을 두어야 후세의 박잡한 정치에 이끌리지 않게 되고, 因循姑息하는 세속의 논의에 미혹되지 않을 것입니다. 스스로 아는 것은 밝음을 지극히 하고, 도를 믿는 것은 돈독함을 지극히 하며, 현인에게 일을 맡기면서 의심하지 말고, 사악한 자를 제거하면서 의심하지 말아 반드시 三代의 융성했던 세상을 만들겠다고 기약을 한 뒤에 그쳐야 합니다.
이 글은 孔孟의 儒學으로 왕도정치를 구현하고자 한 정호의 정신지향을 잘 보여주고 있다. 군주의 마음을 바르게 하여 성왕의 도를 현실에 실현하고자 한 정호의 정치적 이상은 <請修學校尊師儒取士箚子>․<論養賢箚子>․<論王覇箚子>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정호는 정치의 근본을 풍속을 바르게 하고 賢人․才人을 얻는 것으로 보아,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과 인재선발을 중시하였다. 또한 요순의 왕도정치는 天理의 공정함을 얻어 인륜의 지극함을 극도로 한 것으로 보아, 私心으로 仁義를 표방하는 覇道를 써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또 神宗에게 <論十事箚子>를 올려 師傅․六官․經界․鄕黨․貢士․兵役․民食․四民․山澤․分數 등 국가의 당면한 중대사 10가지를 논하였는데, 그 핵심은 人情에 근본하고 物理에 극진히 하여 현실에 맞게 개혁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정호는 君道를 진달할 적에 반드시 功利를 언급하지 않고 至誠과 仁愛를 근본으로 하였다.
당시 王安石은 神宗에게 신임을 받고 있었는데, 정호와는 생각이 대부분 합치하지 않았다. 왕안석은 정호와 道가 같지 않았지만, 정호를 늘 忠信한 사람이라고 말하였으며, 정호는 왕안석과 정사를 논할 적에 심기를 화평하게 하여 왕안석이 감동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언관들은 있는 힘을 다해 정호를 공격하였다.
정호는 자신의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고, 또 왕안석의 新法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조정에 머물러 있을 수 없어 지방관으로 나아가길 원하였다. 그리하여 1070년 簽書鎭寧軍節度判官事로 차임되었다. 1071년에는 澶州 曹村의 황하 제방이 터진 일을 잘 수습하여 공을 세웠으며, 1072년에는 西京 洛河의 竹木務를 감독하였다. 이후 知扶溝縣事를 역임하고 汝州 酒稅 등을 감독하였다. 정호가 扶溝縣의 수령으로 있을 때 謝良佐와 游酢 등이 임소로 찾아와 배웠다. 이후 찾아와 배우는 자들이 많았는데 呂大臨과 劉絢은 낙양에 있을 때 찾아와 배웠고, 楊時는 穎昌에 있을 때 찾아와 배웠고, 朱光庭은 汝州 務所로 찾아와 배웠다.
1085년 神宗이 승하하고 宣仁皇后가 수렴청정을 할 적에 司馬光이 門下侍郞이 되었는데, 정호를 불러 宗正寺丞으로 삼았다. 조정에서 정호를 중용하려 했는데, 병이 나서 나아가지 못하다가 6월 15일 별세하였다. 그해 10월 伊川의 先塋에 장사지냈다. 文彦博이 지은 묘비에 ‘明道先生’이라 칭하였다. 1220년(宋 寧宗 嘉定 13년)에 ‘純公’이란 시호를 내렸으며, 1241년(宋 理宗 淳祐 1년) 河南伯에 봉해지고 文廟에 從祀되었다.
정호는 德性이 충만하고 완전하며, 순수하고 화락한 기상이 밖으로 흘러넘치며, 眉目이 맑고 준수하며 말소리가 또렷했다고 한다. 또 하루 종일 塑像처럼 단정히 앉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정호의 성품과 태도에 대해 范祖禹는 “선생의 사람됨은 맑고 밝고 단정하고 깨끗하며, 내면은 정직하고 외양은 방정하였다.”라고 평하였다.
이런 그의 인품은 타고난 자질이 빼어났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학문을 통해 완성된 측면이 있다. 범조우는 “그의 학문은 誠意․正心에 근본을 두고서 성현의 도에 반드시 이를 수 있다고 여겨 力行에 용감히 힘써 한갓 글만 보는 공부를 하지 않았다.”라고 하였으며, 문인 朱光庭은 “선생은 聖人의 誠을 얻은 분이다. 처음 배울 때부터 덕을 이룩하였을 때까지 비록 타고난 자질의 영특함이 보통 사람보다 월등히 뛰어났지만, 우뚝 요약한 견해는 한결같이 誠을 주로 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심성수양의 학문을 통해 眞實無妄의 誠의 경지에 이르는 데 목표를 둔 것을 알 수 있다.
범조우는 정호의 학문에 대해 “맹자가 세상을 떠난 뒤로 ≪中庸≫의 학문이 전해지지 않아 후세의 儒士들은 그 근본을 따르지 않고 그 말단에만 마음을 썼다. 그러므로 요순의 도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런데 선생이 빼어난 지혜로 그 도를 自得하여 성인이 떠난 지 1천여 년 뒤에 그 關鍵을 풀어 곧장 그 내면의 깊숙한 경지를 보아, 천지의 이치를 하나로 통합하고 사물의 변화를 극진히 하였다.”라고 하여, 맹자에서 단절된 中庸의 道를 정호가 다시 밝혔다고 극찬하였다. 문인 朱光庭도 “맹자 이후 1천여 년 뒤에 선왕의 도가 선생을 만나고서 다시 전해졌다.”라고 하였다. 이런 논평을 이어 후대 朱熹는 程先生 형제분이 세상에 태어나 1천 년 동안 전해지지 않던 道統을 이으셨다고 하였다.
이러한 정호의 학문은 ≪大學≫과 ≪中庸≫을 통해 성인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하여 성취한 것이라 하겠다. 이런 그의 사상이 주희에게 전해져 마침내 四書를 새롭게 해석하여 사서를 중심으로 하는 신유학의 경서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정호는 政事를 행하는 데에도 통달하였는데, 백성을 仁愛하는 것으로 근본을 삼았다. 그러므로 부임하는 곳마다 백성들이 부모처럼 떠받들었다. 백성들에게 임하는 수령의 자세는 백성들로 하여금 각자 그들의 실정을 다 말하게 하는 것이었고, 御史가 되어서는 자신을 바르게 하여 남을 바로잡아주려 하였다. 이처럼 정호는 經世濟民의 큰 포부를 가지고 있었지만 당쟁의 와중에 포부를 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정호는 鄠縣 主簿로 있을 적에 아래와 같은 <偶成>이라는 시를 지었다.
옅은 구름 산들바람 한낮이 다 된 때에, 雲淡風輕近午天
꽃을 끼고 버들 길 따라 집 앞 시내 지나네. 傍花隨柳過前川
주변 사람 내 마음의 즐거움을 모르고서, 旁人不識予心樂
한창 공부할 소년이 한가로이 거닌다 말하리. 將謂偸閒學少年
熊節이 편집하고 熊剛大가 주석한 ≪性理群書句解≫에는 이 시의 제목 밑에 “이 시는 사물을 빌어 양기가 상승하고 음기가 소멸하여 生意가 한창 솟아나는 것을 형용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시에 대해 후인들은 孔子의 제자 曾點이 자연의 이치에 동화되어 ‘沂水에 가서 목욕하고 舞雩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조리며 돌아오고자 합니다.’라고 한 기상과 마찬가지라고 평하였다. 이러한 점이 바로 마음에 한 점의 人欲도 남기지 않고 제거하여 天理에 순응하고자 한 정호의 정신지향이라 하겠다.
조선시대 道學者들은 이러한 정호의 정신을 추종하여 산수가 좋은 곳에 정자를 짓고 그 이름을 訪花隨柳亭, 訪隨亭, 過川亭 등으로 명명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정자가 수원 화성에 있는 방화수류정이다.
≪宋史≫ <道學列傳>에 실린 정호에 대한 인물평은 다음과 같다.
정호는 자질과 성품이 보통사람보다 빼어났다. 그런데 충만하게 수양하여 도를 얻어서 온화하고 순수한 기상이 온몸에 흘러넘쳤다.……諸家의 설을 두루 보고 老莊과 佛敎에 출입한 것이 몇십 년이 되었다. 儒家로 돌아와 六經의 본지를 탐구한 뒤에 터득하였는데, 秦․漢 이래로 이 이치를 터득한 사람이 없었다. 사람을 가르칠 적에는 致知로부터 知止에 이르고, 誠意로부터 平天下에 이르고, 灑掃應對로부터 窮理盡性에 이르게 하여 차례차례 순서가 있었다.……사후 文彦博이 衆論을 채택하여 그의 묘비에 쓰기를 ‘明道先生’이라 하였다.
2) 程頤의 생애와 학문
程頤는 程顥의 아우로 1033년(宋 仁宗 明道 2년) 부친의 임소인 湖北省 黃陂縣에서 부친 程珦과 모친 侯氏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字는 正叔, 號는 伊川이며, 諡號는 正公이다.
정이는 유년 시절부터 식견이 높아 예가 아니면 행하지 않았다고 한다. 14∼15세 때 부친의 명으로 형 정호와 함께 周敦頤에게 나아가 수학하였다. 18세 때인 1050년 宋 仁宗에게 上書하여 王道에 마음을 두고 백성을 생각하며 세속의 의론을 물리치고 비상한 공을 기약해야 한다고 진언하였으며, 배운 바를 면전에서 아뢰기를 청하였다. 이런 점을 보면 정이는 젊어서 경세적 포부가 남달랐던 것을 알 수 있다.
정이는 太學에 유학하였다. 그의 나이 20세에 태학을 관장하던 胡瑗이 ‘顔子所好何學論’이라는 제목으로 諸生에게 시험을 보였는데, 程頤가 쓴 답지를 보고 놀라 만나보고서 학식이 있다고 칭찬하였다. 당시 權貴였던 呂公著는 아들 呂希哲로 하여금 정이에게 수학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종유하는 사람들이 날로 많아졌다.
정이는 擧進士(進士出身)가 되어 1059년(宋 仁宗 嘉祐 4년) 廷試에 응시하였는데 낙방하였다. 그러자 다시는 과거시험에 응시하지 않았다. 治平 연간(1064~1067)과 熙寧 연간(1068~1077)에 조정의 근신들이 여러 차례 정이를 천거하였으나, 학문이 부족하다고 사양하며 벼슬살이를 원치 않았다. 희령 연간에 정이는 낙양에서 한가로이 지냈는데, 應詔上書에서 公私와 理欲을 분별하는 관점으로 王安石의 新法에 반대한다는 견해를 진달하였다. 이즈음에 二程 兄弟는 邵雍을 방문하여 ≪周易≫을 해설하면서 도를 논하였으며, 또 張載를 만나 道學을 논하였다. 1080년 정이는 關中으로 가서 그곳의 학자들과 학문을 토론하였다.
1082년 정이는 文彦博에게 上書하여 洛陽城 남쪽 20리 지점에 있는 龍門山 勝德庵 上方寺 옛터에 伊川書院을 세워 저술활동을 하며 학생들을 가르치는 공간으로 삼게 해달라고 하였다. 그 요청이 받아들여져 정이는 이곳에서 20년 동안 강학을 하였는데, 이곳에서 공부한 문인들을 중심으로 하는 伊川學派가 생겨났다.
1085년 神宗이 별세하고 哲宗이 즉위한 뒤 왕안석의 신법에 반대하던 呂公著․司馬光 등이 집권하였다. 이때 門下侍郞 司馬光, 尙書左丞 呂公著, 西京留守 韓絳 등이 정이를 천거하여 汝州 團練推官, 西京國子監 敎授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 다시 불러, 정이는 어쩔 수 없이 대궐로 나아갔다. 그리하여 1086년 秘書省 校書郞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으며, 召對에 응하여 태황태후를 알현하였다. 이때 정이는 여러 차례 철종 황제를 모시고 강설을 했으며, 태황태후에게 황제를 輔養하는 도리를 진언하였다. 1087년 정이는 상소하여 수렴청정을 하는 일에 대해 아뢰었는데, 당시 천하의 일을 자임하여 조금도 회피하는 바가 없었다. 이 때문에 조정의 관리들로부터 미움을 샀다. 諫議大夫 孔文仲이 정이를 탄핵하자, 정이는 田里로 放歸하길 청하여 管勾西京國子監에 차임되었다.
정이는 講官으로 있을 때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예에 따라 자신을 지키며 포폄을 논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학문에 복종하여 及門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또한 그와 뜻이 맞지 않는 반대파도 많이 생겨났다. 당시 정치권에는 洛黨․蜀黨․朔黨 등이 생겨 붕당정치가 시작되었는데, 정이의 문인 賈易․朱光庭 등이 蘇軾을 공격하자, 소식의 당여인 胡宗愈․顧臨 등도 정이를 공격하였다. 정이는 탄핵을 당하자 고향으로 돌아가길 청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여 조정에 머물러 있다가, 1090년 부친상을 당하여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정이는 1092년 부친의 삼년상을 마친 뒤 直秘閣 및 判西京國子監에 제수되었으나, 거듭 사양하면서 儒者의 進退의 도를 극론하였다. 그때 감찰어사 董敦逸이 정이의 상소문에 원망하는 말과 경박한 말이 있다고 탄핵하였다. 1094년 直秘閣, 西京監務 등에 거듭 제수되었으나 정이는 나아가지 않았다. 哲宗은 親政을 하면서 神宗 때의 變法事業을 계속 추진하였다. 이에 정이는 신법을 반대한 인물로 奸黨에 포함되었다. 그리하여 1094년 田里로 放歸되었으며, 곧 유배되어 四川省 涪州에 編管되었다.
정이는 涪州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周易≫ 해석에 전심하여 1099년 ≪易傳≫을 완성하였다. 정이는 宋 徽宗이 즉위한 뒤 峽州로 配所를 옮겼고, 드디어 사면되어 낙양으로 돌아왔다. 1102년 휘종은 희령 연간에 시행했던 신법을 다시 시행하여 정이를 元祐奸黨으로 지목하였다. 1103년 언관이 정이가 글을 지어 조정을 비방한다고 탄핵하자, 휘종은 정이의 出身 이후 문자와 저술을 감찰하게 하였다. 그때 范致虛가 “程某는 邪說詖行으로 衆聽을 惑亂하였는데, 尹焞과 張繹이 羽翼이 되었다.”라고 비방하였다. 정이는 탄핵을 당하자, 낙양 龍門山 남쪽 耙樓山 아래(嵩縣 程村)로 물러나 은거하였으며, 사방에서 찾아오는 학자들을 사양하였다.
≪易傳≫이 만들어진 지 오래되었으나 문인들이 전수받지 못하여 배우기를 청하였는데, 이때 비로소 병석에 누워 尹焞과 張繹에게 이 책을 전수해주었다. 문인 尹焞은 “선생의 평생의 관심은 오직 ≪易傳≫에 있었다. 선생의 학문을 배우고자 하는 자는 이 책을 보면 충분하다.”라고 하였으니, ≪易傳≫은 정이가 일생의 정력을 다해 저술한 책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정이는 스스로 겸손하여 이 책은 7할 정도만을 말했을 뿐이니 학자들이 스스로 체득하고 연구하길 기대한다고 하였다.
정이는 1107년(宋 徽宗 大觀 元年) 9월 집에서 卒하였으니, 향년 75세였다. 정이가 별세했을 때, 낙양에 살던 사람들은 奸黨으로 지목된 洛黨을 두려워하였다. 그러므로 정이를 장사지낼 적에 제문을 지은 사람도 張繹․范域․孟厚․尹焞 등 4인에 불과하였다. 1220년(宋 寧宗 嘉定 13년) ‘正公’이란 시호가 내렸다. 1241년(宋 理宗 淳祐 元年)에는 伊陽伯에 봉해지고 文廟에 종사되었다.
정이는 사람됨이 엄중하여 사람들이 감히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였다고 한다. 涪州로 유배되어 갈 적에 배를 탔는데 배가 거의 전복될 뻔하였다. 배 안의 사람들은 모두 아우성을 쳤는데, 정이는 옷깃을 단정히 하고 평상시처럼 평안히 앉아 있었다. 배가 어렵사리 강가에 이르러 사람들이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었는지 묻자, 정이는 “마음에 誠敬을 보존하였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정이의 심성수양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정이는 자신의 공부에 대해 말하기를 “나는 40세 이전에는 讀誦을 했고, 50세 이전에는 그 意義를 연구했으며, 60세 이전에는 반복해서 그 의미를 연역했고, 60세 이후에 비로소 저술을 하였다. 저술은 부득이해서였다.”라고 하였다. 이를 보면, 그가 도리를 체득하여 자기화하는 공부에 중점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宋史≫ <道學列傳>에 실린 정이에 대한 인물평은 다음과 같다.
蘇軾이 程頤를 달갑게 여기지 않자, 정이의 문인 賈易와 朱光庭 등이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함께 소식을 공격하였다. 胡宗愈․顧臨은 정이를 등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비방하였고, 孔文仲이 그 점을 극론하여 정이는 管勾西京國子監으로 쫓겨났다. 오랜 뒤에 直秘閣에 제수되었으나 거듭 表文을 올려 사양하였다. 董敦逸이 다시 정이가 원망하는 말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자, 정이는 관직을 버렸다. 紹聖 연간 관적을 삭탈당하고 涪州에 유배되었는데, 李淸臣․尹洛이 당일 핍박하여 귀양을 보냈다.……정이는 평생 사람을 가르치길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학자들이 매우 많았으며, 그 연원에 속한 사람들은 모두 명사가 되었다.
≪宋元學案≫에는 二程의 문인을 明道學派와 伊川學派로 분리해 놓았다. 兩門에서 모두 수학한 인물로는 劉絢, 李籲, 謝良佐, 楊時, 游酢, 呂大臨, 呂大忠, 呂大鈞, 田述古, 邵伯溫, 蘇昞 등이 있다. 정호에게만 수학한 문인으로는 候仲良, 劉立之, 朱光庭, 邢恕가 있으며, 정이에게만 수학한 문인으로는 呂希哲, 尹焞, 郭忠孝, 王蘋, 周行己, 許景衡, 李朴, 范沖, 楊國寶, 蕭楚, 陳淵, 羅從彦, 楊迪, 呂義山 등이 있다.
정이는 벼슬을 한 기간이 매우 짧았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저술과 강학으로 보냈다.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제자가 80여 인이나 되었으며, 전국 40여 개 州縣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 가운데 일부 문인들이 정이의 학문을 福建省․折江省․江西省 등 남쪽 지방으로 전했으며, 朱熹로 이어져서 理學을 집대성하게 되었다.
일찍이 정호는 동생 정이에게 말하기를 “훗날 능히 사람들로 하여금 師道를 존엄하게 할 사람은 나의 동생일 것이네. 그러나 만약 후학을 인도하여 타고난 자질에 따라 성취시켜주는 일이라면 나는 그 일을 양보할 수 없네.”라고 하였으니, 二程이 모두 師道를 자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정이가 문인 張繹에게 이르기를 “내가 전에 명도선생의 행장을 지었다. 나의 도는 대개 명도선생과 같으니, 훗날 나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그 글에서 찾으면 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二程의 학문은 세부적으로는 다르지만 큰 차원에서는 같다고 할 수 있다.
3. ≪二程全書≫의 구성과 내용
宋나라 때 도학자들은 도를 구하고 밝히는 데 목표를 두었기 때문에 미사여구로 화려한 修辭를 하는 詞章學을 하찮게 여겼다. 周敦頤는 “도덕에 힘쓸 줄 모르고 단지 文辭를 재능으로 여기는 자는 技藝를 일삼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정신을 계승한 정호는 자제를 가르칠 적에 經學과 讀書를 가르칠 뿐 文字를 짓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으며, 程頤도 人生三不幸을 논하면서 높은 재주를 타고나서 문장에만 능한 것을 세 번째의 불행한 일로 꼽았다.
二程은 이런 지향을 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남긴 글에는 시문이 많지 않다. 정호는 겨우 <大學> 改正說과 ≪文集≫에 전하는 시문을 남겼을 뿐이며, 정이는 ≪易傳≫과 ≪春秋傳≫과 ≪文集≫에 전하는 시문을 남겼을 뿐이다. 지금 전하는 글 중 상당 부분이 문인들이 기록해 놓은 語錄을 후대에 모아 편찬한 것이니, 二程은 모두 시문에 마음을 쓰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二程의 글은 ≪遺書≫, ≪外書≫, ≪文集≫, ≪易傳≫, ≪經說≫, ≪粹言≫ 등 6종으로 분류된다. 이 가운데 ≪유서≫, ≪외서≫, ≪문집≫, ≪경설≫은 송나라 때 단독으로 간행된 판본이 있었는데, 이를 ‘程氏四書’라고 일컬었다. 또 ≪역전≫과 ≪수언≫도 宋元代에 단독으로 간행되었다. 이 6종의 저서는 별책으로 간행되어 유통되다가 명대에 이르러 비로소 합간되었다. 여기서는 ≪二程全書≫에 수록된 이 6종의 저서에 대해 개별적으로 구성과 내용 및 편찬경위 등을 살펴보기로 한다. 여기서는 번역 저본으로 한 규장각본(奎中1470)의 편차에 따라 기술하기로 한다.
1) ≪河南程氏遺書≫
≪遺書≫는 1168년(南宋 孝宗 乾道 4년) 4월 朱熹가 二程의 제자들이 기록해 놓은 語錄을 편찬하여 ≪河南程氏遺書≫라고 이름을 붙여 간행한 것이다. 판본에 따라 권수가 다른데 대체로 29권으로 되어 있다. 권1∼권11은 누구의 말인지 분간하기 어려워 ‘二先生語’라 하였다. 권12∼권15는 정호의 말로 ‘明道先生語’라 하였는데, 二程의 문인 劉絢(1045~1087)이 기록한 것이다. 권16∼권28은 정이의 말로 ‘伊川先生語’라 하였으며, 권29는 ≪遺書≫의 부록이다.
‘二先生語’ 11권 중 권1(二先生語 一)은 문인 李籲가 기록한 것으로 ‘端伯傳師說’과 ‘拾遺’로 되어 있는데, 二程 중 누구의 말인지 분간할 수 없다. 권2는 ‘元豊己未呂與叔東見二先生語’로 張載의 문하에서 공부하던 呂大臨(1040~1092)이 낙양으로 가서 二程에게 入門한 1079년 이후에 들은 것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여대림은 정호와 정이의 말을 구분하여 밑에 정호의 말은 ‘明’자를, 정이의 말은 ‘正’자를 기록해놓았는데, ‘明’은 정호의 호 明道에서 취한 것이고, ‘正’은 정이의 字인 正叔에서 취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구분은 앞부분에만 일부 되어 있고, 뒷부분에는 누구의 말인지 거의 구분이 되어 있지 않다. 권3은 ‘附東見錄後’로, 이 역시 呂大臨이 1079년 낙양으로 가서 二程에게 수학한 이후에 들은 말을 추가로 붙여놓은 것인데, 누구의 말인지 구분이 되어 있지 않다.
권4는 元豊 연간(1078~1085)에 수학한 謝良佐(1050~1103)가 평소 스승에게 들은 말을 훗날 기억하여 기록해 놓은 것으로, ‘謝顯道記憶平日語’와 ‘拾遺’로 되어 있다. 권5는 원풍 연간에 수학한 游酢(1053~1123)가 기록한 것이다. 권6∼권9 4권은 누가 기록한 것인지 알 수 없으며, 또 편명도 없다. 다만 권9는 모두 ≪論語≫와 ≪孟子≫에 대한 二程의 언설로 別錄과 유사하다. 권10은 편명이 ‘少日所聞諸師友說’로 원래 권1 뒤에 있었는데, 누가 기록한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주희가 편찬할 적에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권11은 ‘洛陽議論’으로 1077년 張載가 낙양을 지나가다 二程을 만나 학술을 토론한 것을 장재의 문인 蘇昞이 기록해 놓은 것이다. 소병은 장재에게 오래 수학한 뒤, 후에 二程에게도 배웠다.
권12는 ‘師訓’으로 문인 劉絢이 기록한 정호의 말이다. 권13은 ‘戌冬見伯淳先生洛中所聞’으로 문인 劉絢이 임술년(1082) 겨울 정호를 찾아갔을 때 들은 말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권14는 ‘亥八月見先生於洛所聞’으로 劉絢이 1083년 8월 정호를 찾아갔을 때 들은 말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권15는 ‘亥九月過汝所聞’으로 정호가 1083년 汝州의 酒稅를 監務하러 가다가 劉絢이 살고 있던 河南 緱氏에 들렀을 때 유현이 들은 말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권16은 ‘入關語錄’으로 程頤가 1080년 關中으로 가서 그곳의 학자들과 학문을 토론한 것을 관중의 학자가 기록해 놓은 것이다. 권17은 ‘己巳冬所聞’으로 1089년 겨울에 들은 것을 혹자가 기록해 놓은 것이다. 이 글은 본래 ‘少日所聞諸師友說’ 뒤에 있었는데, 주희가 편찬하면서 옮겨 놓았다. 권18은 편명도 없고, 누가 기록한 것인지도 자세하지 않다. 周行己의 기록이라는 설, 劉安節의 기록이라는 설, 관중 학자의 기록이라는 설이 있으나 모두 분명하지 않다. 내용 중에 1088년에 졸한 劉絢의 이름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기록한 것을 알 수 있다.
권19는 ‘劉元承手編’으로 절강성 永嘉에 살던 문인 劉安節이 1090년∼1097년 사이에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권20은 ‘楊遵道錄’으로 문인 楊時의 長子 楊迪이 기록한 것인데, 정이가 1100년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낙양으로 돌아온 뒤의 일이다. 권21은 ‘周伯忱錄’으로 1101년 周孚先이 찾아와 수학할 때 기록한 것이다. 권22는 ‘師說’로 문인 張繹이 기록한 것이며, 권23은 ‘附師說後’로 程頤를 사숙한 胡安國(1074~1138)의 家本이다. 그 내용이 ‘師說’과 유사하여 ‘師說’ 뒤에 붙여 놓은 것이다. 권24는 ‘伊川雜錄’으로 唐棣가 기록한 것이다. 권25는 ‘附雜錄後’로 延平 陳氏가 전한 것인데, 기록자가 없고 간혹 당체가 기록한 ‘잡록’과 출입하기 때문에 그 뒤에 붙여 놓은 것이다.
권26은 ‘鮑若雨錄’으로 문인 鮑若雨가 기록한 것이다. 권27은 ‘鄒德久本’으로 楊時의 문인 鄒柄이 기록한 것이다. 전에는 권2의 ‘東見錄’ 뒤에 붙어 있었는데, 주희가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권28은 ‘暢潛道錄’으로 문인 暢大隱이 기록한 것이다. 권29는 附錄으로 程頤가 지은 <明道先生行狀>, 程頤 및 문인 劉立之⋅朱光庭⋅邢恕와 벗 范祖禹가 지은 <明道先生門人朋友敍述序>가 차례로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 뒤에 游酢가 지은 <書行狀後>, 呂大臨이 지은 <哀詞>, 程頤가 지은 <明道先生墓表>, 朱熹가 지은 <伊川先生年譜>, 문인 張繹이 지은 <祭文>, 胡安國이 지은 <奏狀> 등 6편의 글이 있다.
2) ≪河南程氏外書≫
≪外書≫는 주희가 ≪河南程氏遺書≫를 편찬한 뒤, 여러 사람들의 기록에서 누락된 것을 수습하여 1173년(南宋 孝宗 乾道 9년)에 12권으로 편찬한 ≪河南程氏外書≫를 말한다. ‘外書’라고 이름을 붙인 연유에 대해 주희는 “내가 ‘外書’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자료를 취한 것이 잡다하고 혹 유래를 알 수 없기에, ≪遺書≫에 비해 학자들은 더욱 정밀하게 선택해서 살펴보고 그 내용을 취해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저본에는 ≪外書≫가 권30∼권39에 수록되어 있다.
권1은 문인 朱光庭이 기록한 ‘朱公掞錄拾遺’로, 주희는 주광정이 들은 것을 스스로 기록한 것인 듯하다고 하였다. 권2는 朱光庭의 질문에 二程이 답한 ‘朱公掞問學拾遺’로 각 단락 끝에 정호의 말은 ‘伯淳’, 정이의 말은 ‘正叔’이라고 字를 기록해 구별해 놓았다. 권3은 ‘陳氏本拾遺’로 楊時의 문인 陳淵이 가지고 있던 것이다. 권4는 ‘程氏學拾遺’로 李籲의 아우 李參이 기록한 것이다. 권5는 ‘馮氏本拾遺’로 汝州의 馮理가 소장하고 있던 것이다.
권6은 ‘羅氏本拾遺’로 楊時의 문인 羅從彦이 가지고 있던 것이다. 권7은 ‘胡氏本拾遺’로 二程을 사숙한 胡安國의 家本이다. 권8은 ‘游氏本拾遺’로 문인 游酢의 家本이다. 권9는 ‘春秋錄拾遺’로 문인 王蘋이 정이에게 수학할 때 ≪春秋≫에 대해 언급한 것을 집록한 것이다. 권10은 ‘大全集拾遺’로 建陽에서 印出한 판본이다. 권11은 ‘時氏本拾遺’로 時紫芝가 집록한 것이다. 권12는 ‘傳聞雜記’로 ≪呂氏家塾記≫ 등 20여 종의 기록에서 二程에 관한 기록을 발췌한 것이다.
3) ≪河南程氏粹言≫
≪河南程氏粹言≫은 二程의 문인 楊時가 二程의 語錄을 訂定한 것을 남송 때 張栻이 새로 편집해 만든 책으로, 상․하 2권으로 되어 있다. 맨 앞에는 장식이 지은 <粹言序>가 있으며, 권1에는 <論道篇>, <論學篇>, <論書篇>, <論政篇>, <論事篇> 등 5편이 실려 있으며, 권2에는 <天地篇>, <聖賢篇>, <君臣篇>, <心性篇>, <人物篇> 등 5편이 실려 있다. 저본에서 ≪粹言≫은 권40∼권41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은 대체로 ≪遺書≫와 ≪外書≫ 등에 있는 내용과 유사한데, 二程을 모두 ‘子曰’로 표기하여 누구의 말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이 책은 二程의 어록 중에서 중요한 내용을 뽑아 주요 주제별로 분류해 놓음으로써 二程의 학술과 사상을 주제별로 이해하는 데 편리하게 한 장점이 있다.
4) ≪周易程氏傳≫
≪周易程氏傳≫은 程頤가 1093년에 저술을 시작하여 涪州에 유배되었을 때인 1099년(宋 哲宗 元符 2년)에 완성한 책으로 ‘伊川易傳’, ‘程氏易傳’, ‘周易傳’이라고도 부른다. 이 책은 문인 楊時가 교정한 것으로, ≪文獻通考≫에는 10권, ≪宋史≫ <藝文志>에는 9권, ≪東都事略≫에는 6권, ≪二程全書≫에는 4권으로 되어 있는데, 현재 통행본은 4권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은 明나라 永樂 연간 大全本이 만들어질 때 주희의 ≪易本義≫와 합해 각 괘에 나누어 붙여 놓았다. 저본에서 ≪易傳≫은 권42∼권45에 편차되어 있는데, 첫머리에 ‘易傳四篇’이라고만 써 넣고 그 내용은 모두 수록하지 않았다.
정이는 이 책을 저술한 뒤 문인들에게조차 공개하지 않고 70세까지 수정하려고 하였으며, 노년에 문하의 제자들이 청한 뒤에야 보여주었다. 楊時의 <跋語>에 의하면 이 책을 문인 張絳에게 주었는데, 장강이 곧 죽어 원본이 없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양시가 여러 사람이 전하는 것을 모아 다시 교정했다고 한다.
맨 앞에 정이가 쓴 <易傳序>가 있고, 그 다음에 필자 미상의 <易序>가 있고, 그 다음에 정이가 지은 <上下篇義>가 있다. 그리고 권1에 周易上經 上, 권2에 周易上經 下, 권3에 周易下經 上, 권4에 周易下經 下가 차례로 수록되어 있다. 권1에는 乾卦부터 大有卦까지 14괘가, 권2에는 謙卦부터 離卦까지 16괘가, 권3에는 咸卦부터 升卦까지 16괘가, 권4에는 困卦부터 未濟卦까지 18괘가 실려 있다. 孔子가 지은 十翼 가운데 <彖傳>, <象傳>, <文言>, <序卦>는 각 괘에 나누어 붙여 놓았고, <繫辭>, <說卦>, <雜卦>는 별도의 해석을 가하지 않았다. 이 책은 후대 義理學으로 ≪周易≫을 해석한 중요한 해석서로 자리매김하였다.
5) ≪河南程氏經說≫
≪河南程氏經說≫은 총 8권으로 되어 있다. 저본에서 ≪經說≫은 권46∼권53에 편차되어 있는데, 권46에는 <易說>, 권47에는 <書解>, 권48에는 <詩解>, 권49에는 <春秋傳>, 권50에는 <禮記>, 권51에는 <論語說>, 권52에는 <孟子解>, 권53에는 <中庸解>가 실려 있다.
이 ≪經說≫에는 정호와 정이의 경전에 관한 설이 경전별로 분류되어 있는데, 누가 어떻게 편찬했는지는 자세하지 않다. 8권 중 권5의 <禮記>에 실린 <明道先生改正大學>만이 정호의 저술이고, 나머지는 모두 정이의 저술이다. 송대 간행된 ≪經說≫은 모두 정이의 경전해석으로 원래 <繫辭解> 1권, <書解> 1권, <詩解> 2권, <春秋解> 1권, <論語解> 1권, <改定大學> 1권이었다. 그런데 명나라 때 간행하면서 <詩解>를 1권으로 하고, <孟子解> 1권과 <中庸解> 1권을 더하여 총 8권으로 만든 것이다. <孟子解>는 ≪遺書≫와 ≪外書≫에서 뽑아 만든 것이고, <中庸解>는 주자의 변증에 따르면 문인 呂大臨이 편찬한 것이다.
권8의 <中庸解> 뒤에 按說을 붙여 놓은 것이 있는데, 이는 朱彛尊의 ≪經義考≫에도 실린 明나라 때 康紹宗의 설로 다음과 같다.
살펴보건대, 晁昭德의 ≪讀書志≫에 “明道의 ≪中庸解≫ 1권이 있다.”고 했는데, 伊川의 大全集에도 이 글이 실려 있다. 내 삼가 살펴보건대, ≪中庸≫에 대해 명도는 저술을 하지 않았다. 伊川은 ≪중용≫에 대한 해석서를 만들었다고 말했으나, 스스로 그 내용을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아 이미 불태워버렸다. 이 ≪중용해≫를 반복해 살펴보건대, 藍田呂氏(呂大臨) 강당의 初本을 朱子가 분변한 개정본이 확실하다.
이러한 설에 의거해서 朱彛尊도 이 ≪中庸解≫를 呂大臨이 편찬한 것으로 보았다.
권1은 易說로 ≪周易≫ <繫辭傳>에 대한 설 17조가 수록되어 있으며, 권2는 ≪書經≫에 대해 해석한 것으로 <堯典>, <舜典>, <改正武成> 3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改正武成>은 <武成>을 개정한 것이다. 권3은 ≪詩經≫에 대해 해석한 것으로 國風, 小雅, 大雅로 구분하고 각 편별로 해석해 놓았는데, 국풍에는 <關雎> 등 46편, 소아에는 <鹿鳴> 등 17편, 대아에는 <旱麓> 등 2편의 해석이 있다. 권4는 ≪春秋≫에 대해 해석한 것으로, ≪春秋≫의 편차에 따라 기술해 놓았다. 맨 뒤에 1103년 정이가 쓴 <春秋傳序>가 실려 있다. 권5는 ≪禮記≫에 수록된 <大學>에 錯簡이 있다고 판단해 편차를 개정하여 새롭게 해석한 정호와 정이의 <改正大學> 2편이 수록되어 있다.
권6은 ≪論語≫에 대해 해석한 것으로 <學而>부터 <子罕>까지 9편을 해석한 것이다. 全文을 모두 인용해 해석한 것이 아니고, 문제가 되는 구절에 대해 간결하게 해석한 것이다. 권7은 ≪孟子≫에 대해 해석한 것으로, 후인들이 ≪遺書≫와 ≪外書≫에 있는 내용을 纂集한 것으로 보아 全文을 수록하지 않았다. 권8은 ≪中庸≫에 대해 해석한 것으로 全文을 실어놓았다.
6) ≪河南程氏文集≫
≪文集≫은 二程의 詩文集인 ≪河南程氏文集≫으로, 저본에는 권54∼권68에 편차되어 있는데, 程顥의 시문 5권(권54∼권58)과 程頤의 시문 8권(권59∼권66)으로 되어 있다. 그 뒤 권67에는 16편의 遺文을 모아놓았고, 권68은 附錄이다. 이 문집은 판본에 따라 ≪明道先生文集≫과 ≪伊川先生文集≫으로 구분해 놓기도 하였다.
明道文集인 권54에는 <顔樂亭銘> 및 詩 39題 63首가 수록되어 있으며, 권55에는 表․疏 10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권56에는 書․記․祭文․行狀 5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권57에는 墓誌 7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권58에는 程文 3편이 수록되어 있다.
伊川文集인 권59는 上書로 <上仁宗皇帝書> 등 6편이 수록되어 있고, 권60은 表․疏로 30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권61은 學制에 관한 글 5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권62는 雜著로 <顏子所好何學論> 등 17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권63은 書․啓로 32편의 書牘이 실려 있으며, 권64는 禮로 <婚禮> 등 6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권65는 行狀․墓誌․祭文으로 12편이 실려 있으며, 권66은 墓誌․家傳․祭文으로 11편이 실려 있다.
권67은 遺文으로 16조가 실려 있는데, 그중 <放蝎頌> 등 6편은 闕文이다. 권68은 附錄으로 주희의 <晦菴辯論胡本錯誤書>가 실려 있다. 그 뒤에 ≪明道先生遺文≫을 長沙에서 간행할 때 張栻이 1169년에 쓴 後序, 趙師耕이 ≪河南程氏遺書≫와 ≪河南程氏外書≫를 간행하면서 1246년에 쓴 麻沙本後序, 李襲之가 春陵에서 ≪河南程氏遺書≫와 ≪河南程氏外書≫를 간행할 때 쓴 春陵本後序, ≪遺書≫, ≪外書≫, ≪文集≫, ≪經說≫을 合刊하면서 1248년 張玘가 쓴 後序, 1322년 鄒次陳이 ≪河南程氏文集≫을 다시 간행할 때 쓴 後識, 譚善心이 ≪河南程氏遺書≫와 ≪河南程氏文集≫을 간행할 때 虞槃이 쓴 後識 등이 차례로 실려 있다. 이를 통해 宋⋅元代 二程의 ≪遺書≫, ≪外書≫, ≪文集≫ 등을 간행한 경위를 대략이나마 알 수 있다.
4. ≪二程全書≫의 편찬과 간행
1) 중국에서의 편찬 및 간행
二程의 저술은 그의 문인들에 의해 편찬되기 시작하여 송나라 때는 ≪遺書≫, ≪外書≫, ≪經說≫, ≪文集≫ 등이 개별적으로 간행되었는데, 이 4종의 책을 ‘程氏四書’라고 불렀다. 그리고 ≪易傳≫, ≪粹言≫ 등도 별책으로 간행되었다.
二程의 저술을 모두 묶어 합간한 것은 명나라 때에 이루어졌다. 1476년(明 憲宗 成化 12년) 南陽知府 段堅이 판각한 62권의 ≪二程全書≫가 있는데, 이를 成化本이라 부른다. 이 판본은 ≪遺書≫, ≪外書≫, ≪明道文集≫, ≪伊川文集≫, ≪易傳≫, ≪經說≫, ≪粹言≫ 등 7부로 되어 있다. 이 판본은 현재 중국 南京圖書館에 소장되어 있는데, 후대 별로 언급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널리 유통되지 못한 듯하다.
다음 1498년(明 孝宗 弘治 11년) 河南布政司 左參議 武定 康紹宗이 새로 편집하고, 河南按察使 僉事 淸江 彭綱이 교정하고, 李瀚이 서문을 쓴 것을 河南府 知府 平陽 陳宣이 판각하여 간행한 65권의 ≪二程全書≫가 있는데, 이를 弘治本이라 부른다. 이 책은 현재 중국 南京圖書館 및 미국 하버드대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이 판본은 성화본에 <洛陽程氏家譜>, <畵像贊>, <程顥傳> 등이 증보된 것이다. 이 판본은 널리 유통되어 우리나라에도 유입되어 간행되었다.
또 1606년(明 神宗 萬曆 34년) 石門의 呂氏가 徐必達의 교열을 받아 程氏四書 및 ≪易傳≫, ≪粹言≫을 합간하여 河南程氏祠堂에서 인출한 ≪二程全書≫가 있는데, 이 판본을 石門呂氏本이라 부른다. 이 판본은 北京大 등에 소장되어 있는데, 후대에 널리 유통되었다.
≪二程全書≫는 청나라 때에도 몇 차례 간행되었는데, 대체로 석문여씨본을 저본으로 한 것이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청나라 초기에 長沙 小嫏 嬛山館에서 판각한 것과 永寧에서 程湛 등이 교정하여 판각한 판본이다. 長沙本은 흔히 齋兒呂氏寶話堂刊本이라고 한다. 그리고 1871년 六安求我齋 涂宗瀛이 석문여씨본을 다시 訂正하여 간행하였는데, 이를 현대 활자본으로 간행한 것이 漢京文化事業有限公司에서 인출한 2책의 ≪二程集≫이다. 이후 1908년 澹雅局에서 重刊한 16책의 ≪二程全書≫가 있고, 1925년 校經山房에서 石版本으로 印出한 ≪二程全書≫가 있는데, 모두 석문여씨본을 저본으로 교정한 것이다.
2) 한국에서의 편찬 및 간행
1515년(中宗 10년) 11월 홍문관 부제학 金謹思 등이 중국에서 서적을 널리 구하자고 건의한 상소에 ≪二程全書≫와 같은 책은 개인이 소장하고 있을 뿐 홍문관에는 전혀 없다고 하였으니, ≪二程全書≫가 우리나라에 유입된 것은 1515년 이전으로 추정된다. 이 판본은 陳宣刊本으로 추정된다. 중종은 김근사의 청을 받아들여 예조로 하여금 개인이 가지고 있던 ≪二程全書≫를 구하여 간행하게 하였다. 이 책은 甲辰字體 訓鍊都監字本으로 중종 연간과 명종 연간에 간행되었는데 국립중앙도서관, 고려대학교 도서관 등에 보관되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갑진자체 훈련도감자본 중 일산古3745-51은 2책만 남아 있고, 일산古3745-50은 완질이 남아 있다. 이 책 앞에 있는 <重刊二程全書總目>에 의하면, ≪遺書≫ 28권과 <附錄> 1권, ≪外書≫ 12권, ≪經說≫ 8권, ≪文集≫ 13권, <文集拾遺> 1권, <續附錄> 2권 등 총 65권 분량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二程全書≫(일산古3745-50)의 ‘상세정보’에 의하면, 총목에 있는 65권에 <目錄> 1권과 ≪粹言≫ 2권을 합해 16책이라 하였으니, 총 68권 16책으로 간행한 것을 알 수 있다. ≪二先生粹言≫ 2권이 별책으로 간행되어 총목에 넣지 않은 것이다.
陳宣刊本 중 1787년 중국에서 간행한 ‘齋兒呂氏寶話堂初星沙小向嬛山館重校刊’이라는 刊記가 붙은 판본(국립중앙, 일산古3745-65)과 조선에서 간행한 훈련도감자본(일산古3745-50)을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